들판체육관의 배틀필드에 서는 것은 두 번째였다.
정확히는 세 번째려나.
마지막 도전으로부터 거의 6년―그간 많은 배틀을 겪고서 다시 한번 여기에 선 운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이런 초조함은 또 얼마 만일까. 이런 초조함이 싫어서, 다른 지방에 가서도 한 번도 체육관 도전은 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곳에 향했다.
포켓몬 트레이너 운명이 최고로 잘나가던 시절, 운명의 배지 케이스에는 여섯 개의 배지가 있었다. 일곱 개째의 배지는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운명은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들판체육관에 되돌아온 것이었다. 체육관 배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멘티들보다 한참 늦게 일곱개째의 배지를 딴다고 해도 자기 자신 외에는 인정해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 이것은 온전히 자기만족으로, 단지 만들기 시작한 포핀을 완성하듯이, 쓰기 시작한 문장을 끝맺듯이. 그런 의미로 운명은 배틀필드에 서 있었다.
"일곱 번째 도전인 거지?"
"네~ 다섯 마리로 갈게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는 기분으로, 운명은 들고 있던 피카츄를 관중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미안, 피카츄! 오늘은 너만 빼고야!"
무사히 착지한 피카츄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카피-, 한마디 쏘아붙였지만, 얌전히 관중석에 있어주었다.
관중.
마지막으로 관중 앞에서 했던 배틀이었던 무쇠체육관전은 (상성 상의 유리함도 있었고, 끝내 어떻게든 승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완전히 엉망이었다. 모두의 눈앞에서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러나 동시에 배틀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
이제는 다르다. 운명은 선글라스 너머로 이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 그리고 물론 그 옆에서 뺨에서 스파크를 튀길 기세로 강하게 바라봐 오는 피카츄의 시선도, 전부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운명은 살짝 웃었다.
틀림없이 손에 들어올 네이쳐배지의 감촉을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 * *
홍옥은 체리꼬로 시작했다.
운명의 시작은 패리퍼였다. 체육관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할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체리꼬, 쾌청!"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눈부신 햇살이 필드를 메웠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야 진정한 형태를 찾는 체리꼬를 보며, 운명은 잠시 메가진화를 떠올렸다.
이번에 호연지방에서도 물짱이를 찾지 못했으니 평생 체험해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유턴! 돌아와!"
약점을 찔렀다고는 하지만 거뜬해보이는 체리꼬를 뒤로 하고, 패리퍼는 트레이너의 곁으로 돌아와 로파파와 교대했다. 다음 기술이 속이다가 될 것은 홍옥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고, 운명의 예상대로 체리꼬는 속이다를 맞고 풀이 죽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햇살은 계속 강했다.
"꽃보라!"
"이쪽은 냉동빔!"
스피드는 체리꼬 쪽이 눈에 띄게 빨랐다. 환하고 따스한 태양 아래 푸르른 잔디, 그리고 휘몰아치는 꽃보라까지―완연한 봄을 이런 한겨울에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도 역시 들판체육관밖에 없었다. 보드라운 꽃잎은 폭풍 같은 바람과 어우러져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로파파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도 크게 휘청거리는 로파파를 확인하며 운명은 고개를 작게 끄떡거렸다. 레벨 차가 이 정도란 말이지.
반면, 계속해서 체리꼬의 약점을 노리는 운명이었지만, 로파파의 냉동빔은 만개한 체리꼬에게는 그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듯 보였다. '어라, 분명히 맞췄는데.' 로파파가 살짝 어리둥절했다.
"계속해서 꽃보라!"
"잘 한 거야, 미네랄! 이제 돌아와도 돼!"
그래도 아까의 유턴과 속이다를 생각하면 저 녀석도 나름대로 지쳤을 거야. 운명은 로파파를 격려하며 몬스터볼로 되돌렸다. 애초에 레벨이 썩 높지 않은 로파파에게 기대한 것은 큰 데미지가 아니었고, 로파파는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패리퍼의 재등장~!"
‘아차, 닉네임 깜빡했다.’ 하고 덧붙이며 몬스터볼에서 다시 한번 물새포켓몬을 꺼냈다. 실내에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체리꼬는 움츠러들었다. 움츠러든 체리꼬의 꽃보라는 패리퍼에게 크게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첫 턴과 같은 필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처음과 같은 수를 쓸 것인가?
들판체육관 관장의 반짝이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은 짧다.
상대방을 쳐다봐도 마음은 읽을 수 없다.
상대방의 다음 행동을 확실하게 예측하는 방법 따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무슨 수를 쓰든, 불리해지지 않은 수를 잡아라.
"쾌청이야, 체리꼬!"
"유턴이다! 로파파, 다시 한번 부탁해!"
일견 첫 턴으로 되돌아간 듯한 배틀필드였다.
하지만 처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달라진 점은 체리꼬의 남은 체력이었다. 체리꼬는 이제는 겨우 두 발로 서있는 듯,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음 기술이 스치기만 하면 쓰러질 터였다.
체리꼬는 활짝 피어있었지만 상황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운명이었다.
"속이다!"
"돌아와, 체리꼬!"
역시 여기선 교체를 예상하고 냉동빔을 쏘는 편이 나았으려나.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홍옥이 교체를 택하지 않았을 경우의 리스크가 컸을 것이다. 운명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었다. 그리고 로파파는 그런 트레이너를 향해 끄떡였다.
속이다는 아쉬운 대로 교체로 나온 리피아에게 명중했고, 햇살은 계속 강했다. 홍옥의 리피아의 특성은 분명… 엽록소.
조금 느리더라도 아무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칼춤!"
"최고의 냉동빔을 보여줘~!!"
'최고'라는 말에 사기가 한껏 올라간 로파파가 공중에 폴짝 뛰어 최선의 냉동빔을 뱉었다. 겨울에 걸맞은 얼얼한 냉동빔은 리피아의 체력을 반 정도는 깎아낸 듯 보였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아주 빠르고 날카로워진 흉기 같은 리피아긴 했지만, 운명은 로파파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했어, 로파파~ 최고야! 미네랄!"
"… 저기, 그 '미네랄'이라는 게 로파파 닉네임이야?"
역시 궁금하다는 듯, 배틀에 열중하던 홍옥이 언뜻 물었다.
"맞아요~. 붙인 지 얼마 안 돼서 자주 까먹지만, 얘가 미네랄이고 저~기 있는 피카츄가 사이다야!"
"헤에, 합쳐서 미네랄 사이다? … 리피아, 리프블레이드!"
"합쳐서 미네랄 사이다! … 미네랄, 교체야!"
비를 뿌리며 교체로 나온 패리퍼가 로파파 미네랄을 대신해서 리피아의 리프블레이드를 맞았다.
패리-, 하는 단말마와 함께 운명의 엔트리에서 가장 강한 포켓몬이고 비행 타입을 겸한 패리퍼가 한 방에 쓰러진 것은 확실히 생각지 못한 변수였지만, 운명은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짧은 상념을 매듭지었다.
"고마워, 태양. 좀 쉬고 있어."
어느 모로 보나 더이상 전투가 불가능한 패리퍼를 몬스터볼로 되돌리고, 운명이 다음 포켓몬을 내보냈다.
"가자, 메가대짱이!"
운명이 던진 몬스터볼에서 빛과 함께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고, 포켓몬의 정체가 드러나자 놀란 표정은 실소로 변했다. 운명은 조금 키득거렸다.
―빅굴. ('누가 메가대짱이냐.')
"… 저기, 혹시 두빅굴 닉네임이 메가대짱이야?"
"아니야!"
홍옥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정했다.
"… 그치만 닉네임은 좀 부르기 어렵거든요. 두빅굴, 오물웨이브!"
"뭐길래? … 리피아, 돌아와! 로젤리아, 네 차례야!"
두빅굴의 빠른 오물웨이브는 안타깝게도 리피아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로젤리아에게 약간의 데미지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타입 상성이라면 로젤리아가 단연 유리했다. 하지만 홍옥이라면, 아니, 자신이었다면 이 상황에서는 공격으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쪽에 있어서는 한 번 더 칠 기회였다.
"두빅굴! 대지의힘!"
"로젤리아, 쾌청!"
비는 쏙 들어갔지만 운명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만약 거기서 매지컬리프를 맞았다면 두빅굴을 잃었을 것이다.
"로젤리아, 매지컬리프!"
"잘했어, 두빅굴! 교대야!"
아직 싸우고 싶어하는 얼굴의 두빅굴을 되돌리고 내보낸 선수는 너트령이었다. 너트령은 과연, 웃는 낯으로 로젤리아의 매지컬리프를 튕겨냈다. 햇살은 강했고 너트령의 표정도 햇살처럼 환했다.
"… 다시 한번!"
"맞아주고 저주해!"
가려울 뿐인 매지컬리프를 한 차례 더 받아내고 철시드는 도무지 남을 저주할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저주를 쌓았다.
홍옥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홍옥은 로젤리아를 되돌리고, 체리꼬를 내보냈다. 그 사이에 너트령은 한 번 더 무언가를 저주했지만, 강한 햇살과 만개한 체리꼬를 보고서 운명은 이번에는 반대로 궁지에 몰렸음을 판단했다. 쌓아둔 저주가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웨더볼!"
"돌아와, 너트령! 두빅굴, 나와!"
불꽃의 덩어리가 된 웨더볼은 눈앞에서 사라진 너트령으로부터 빗나가 두빅굴에게 명중했고, 그제서야 장내를 비추던 햇살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운명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체리꼬, 꽃보라!"
"두빅굴 교체! 다음은~… 너로 정했다!"
기껏 나왔음에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두빅굴을 다시 몬스터볼로 부르며, 운명이 다음 카드를 꺼냈다.
"아직 좀 추운 것 같거든!"
콧구멍에서 연기를 뿜으며 나타난 포켓몬은 코터스였다.
따스하다기보다도 뜨거운 햇살이 또다시 장내를 가득 채웠다.
"뭐야, 너도 맑은 걸 좋아해?"
의외라는 듯이 말하는 홍옥에게, 운명은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좋아,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데!"
햇빛을 받은 체리꼬는 다시한번 움츠러든 몸을 폈다. 그 꽃보라는 코터스에게는 효과가 별로였지만.
"얕보지 말라구! 체리꼬, 광합성!"
"누가 얕봤다고 그래~? 코터스, 풀파워로 분화야!"
의욕이 가득한 코터스의 분화에 각 트레이너는 튀는 불꽃에 데이지 않기 위해 조금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체리꼬는 그것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렇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직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코터스보다 빠른 체리꼬와 딱 두 번의 공격으로 체리꼬를 쓰러뜨릴 힘이 있는 코터스.
양측의 트레이너에게 긴 배틀이 보였다.
광합성과 분화가 4회 반복되고, 어느 한쪽도 쓰러지지 않은 채로 해가 가라앉았다.
"체리꼬, 광합성!"
홍옥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 최선을 골랐다. 운명은 달뜬 숨을 훅, 내뱉고는 땀을 닦고 코터스를 되돌렸다.
"너트령, 널 믿어!"
"체리꼬, 쾌청!"
쾌청에서 웨더볼로 이어지는 흐름은 분명히 너트령에게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생은 타이밍이다.
"자이로볼로 밀어버려~!"
-자신감이기도 하고.
운명은 경험과 계산에 근거해 믿었고, 너트령은 깔끔한 한 방으로 체리꼬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더이상 너트령을 위협할 다음 턴의 불꽃 웨더볼 같은 건 없었다.
웨더볼이 선택지에서 사라지자, 홍옥에게는 너트령을 쓰러뜨릴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들판체육관이 풀 타입 체육관이기 때문이었다.
홍옥에게 남은 승리의 가능성은 운명의 실수 뿐이었다. 하지만 승리를 목전에 둔 운명에게는 서두름도, 방심도, 과한 걱정도 없었다.
그저 침착한 저주와 자이로볼의 적절한 운용으로 홍옥의 풀 포켓몬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체력이 반 남은 리피아가 쓰러졌고, 기나긴 배틀이 끝났다.
* * *
포켓몬센터에서 건강해진 포켓몬들과 함께 나온 운명은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은 일곱번째 배지를 높이 들고 겨울의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고마워, 모두들. 다~ 너희 덕분이야."
들판체육관에서 잘 싸워준 포켓몬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칭찬도 잊지 않고 전달한 뒤, 기다려준 사람을 마주했다.
"그럼 다음 배틀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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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35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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