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체육관의 배틀필드에 서는 것은 두 번째였다.

정확히는 세 번째려나.

마지막 도전으로부터 거의 6년―그간 많은 배틀을 겪고서 다시 한번 여기에 선 운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이런 초조함은 또 얼마 만일까. 이런 초조함이 싫어서, 다른 지방에 가서도 한 번도 체육관 도전은 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곳에 향했다.

포켓몬 트레이너 운명이 최고로 잘나가던 시절, 운명의 배지 케이스에는 여섯 개의 배지가 있었다. 일곱 개째의 배지는 가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운명은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들판체육관에 되돌아온 것이었다. 체육관 배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멘티들보다 한참 늦게 일곱개째의 배지를 딴다고 해도 자기 자신 외에는 인정해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 이것은 온전히 자기만족으로, 단지 만들기 시작한 포핀을 완성하듯이, 쓰기 시작한 문장을 끝맺듯이. 그런 의미로 운명은 배틀필드에 서 있었다.

 

"일곱 번째 도전인 거지?"

"네~ 다섯 마리로 갈게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는 기분으로, 운명은 들고 있던 피카츄를 관중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미안, 피카츄! 오늘은 너만 빼고야!"

무사히 착지한 피카츄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카피-,  한마디 쏘아붙였지만, 얌전히 관중석에 있어주었다. 

관중.

마지막으로 관중 앞에서 했던 배틀이었던 무쇠체육관전은 (상성 상의 유리함도 있었고, 끝내 어떻게든 승리로 돌아가긴 했지만) 완전히 엉망이었다. 모두의 눈앞에서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러나 동시에 배틀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치던 시절.

이제는 다르다. 운명은 선글라스 너머로 이쪽을 향하고 있는 시선, 그리고 물론 그 옆에서 뺨에서 스파크를 튀길 기세로 강하게 바라봐 오는 피카츄의 시선도, 전부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운명은 살짝 웃었다.

틀림없이 손에 들어올 네이쳐배지의 감촉을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 * *

 

 

홍옥은 체리꼬로 시작했다.

운명의 시작은 패리퍼였다. 체육관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할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체리꼬, 쾌청!"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눈부신 햇살이 필드를 메웠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야 진정한 형태를 찾는 체리꼬를 보며, 운명은 잠시 메가진화를 떠올렸다.

이번에 호연지방에서도 물짱이를 찾지 못했으니 평생 체험해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유턴! 돌아와!"

약점을 찔렀다고는 하지만 거뜬해보이는 체리꼬를 뒤로 하고, 패리퍼는 트레이너의 곁으로 돌아와 로파파와 교대했다. 다음 기술이 속이다가 될 것은 홍옥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고, 운명의 예상대로 체리꼬는 속이다를 맞고 풀이 죽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햇살은 계속 강했다. 

"꽃보라!"

"이쪽은 냉동빔!"

스피드는 체리꼬 쪽이 눈에 띄게 빨랐다. 환하고 따스한 태양 아래 푸르른 잔디, 그리고 휘몰아치는 꽃보라까지―완연한 봄을 이런 한겨울에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도 역시 들판체육관밖에 없었다. 보드라운 꽃잎은 폭풍 같은 바람과 어우러져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로파파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도 크게 휘청거리는 로파파를 확인하며 운명은 고개를 작게 끄떡거렸다. 레벨 차가 이 정도란 말이지.

반면, 계속해서 체리꼬의 약점을 노리는 운명이었지만, 로파파의 냉동빔은 만개한 체리꼬에게는 그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듯 보였다. '어라, 분명히 맞췄는데.' 로파파가 살짝 어리둥절했다.

"계속해서 꽃보라!"

"잘 한 거야, 미네랄! 이제 돌아와도 돼!"

그래도 아까의 유턴과 속이다를 생각하면 저 녀석도 나름대로 지쳤을 거야. 운명은 로파파를 격려하며 몬스터볼로 되돌렸다. 애초에 레벨이 썩 높지 않은 로파파에게 기대한 것은 큰 데미지가 아니었고, 로파파는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었다.

"패리퍼의 재등장~!"

‘아차, 닉네임 깜빡했다.’ 하고 덧붙이며 몬스터볼에서 다시 한번 물새포켓몬을 꺼냈다. 실내에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체리꼬는 움츠러들었다. 움츠러든 체리꼬의 꽃보라는 패리퍼에게 크게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첫 턴과 같은 필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처음과 같은 수를 쓸 것인가?

들판체육관 관장의 반짝이는 눈을 들여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은 짧다.

상대방을 쳐다봐도 마음은 읽을 수 없다.

상대방의 다음 행동을 확실하게 예측하는 방법 따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무슨 수를 쓰든, 불리해지지 않은 수를 잡아라.

"쾌청이야, 체리꼬!"

"유턴이다! 로파파, 다시 한번 부탁해!"

일견 첫 턴으로 되돌아간 듯한 배틀필드였다.

하지만 처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달라진 점은 체리꼬의 남은 체력이었다. 체리꼬는 이제는 겨우 두 발로 서있는 듯,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음 기술이 스치기만 하면 쓰러질 터였다.

체리꼬는 활짝 피어있었지만 상황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운명이었다.

"속이다!"

"돌아와, 체리꼬!"

역시 여기선 교체를 예상하고 냉동빔을 쏘는 편이 나았으려나.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홍옥이 교체를 택하지 않았을 경우의 리스크가 컸을 것이다. 운명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었다. 그리고 로파파는 그런 트레이너를 향해 끄떡였다.

속이다는 아쉬운 대로 교체로 나온 리피아에게 명중했고, 햇살은 계속 강했다. 홍옥의 리피아의 특성은 분명… 엽록소.

조금 느리더라도 아무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칼춤!"

"최고의 냉동빔을 보여줘~!!"

'최고'라는 말에 사기가 한껏 올라간 로파파가 공중에 폴짝 뛰어 최선의 냉동빔을 뱉었다. 겨울에 걸맞은 얼얼한 냉동빔은 리피아의 체력을 반 정도는 깎아낸 듯 보였다. 비록 눈앞의 상대는 아주 빠르고 날카로워진 흉기 같은 리피아긴 했지만, 운명은 로파파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했어, 로파파~ 최고야! 미네랄!"

"… 저기, 그 '미네랄'이라는 게 로파파 닉네임이야?"

역시 궁금하다는 듯, 배틀에 열중하던 홍옥이 언뜻 물었다.

"맞아요~. 붙인 지 얼마 안 돼서 자주 까먹지만, 얘가 미네랄이고 저~기 있는 피카츄가 사이다야!"

"헤에, 합쳐서 미네랄 사이다? … 리피아, 리프블레이드!"

"합쳐서 미네랄 사이다! … 미네랄, 교체야!"

비를 뿌리며 교체로 나온 패리퍼가 로파파 미네랄을 대신해서 리피아의 리프블레이드를 맞았다.

패리-, 하는 단말마와 함께 운명의 엔트리에서 가장 강한 포켓몬이고 비행 타입을 겸한 패리퍼가 한 방에 쓰러진 것은 확실히 생각지 못한 변수였지만, 운명은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짧은 상념을 매듭지었다.

"고마워, 태양. 좀 쉬고 있어."

어느 모로 보나 더이상 전투가 불가능한 패리퍼를 몬스터볼로 되돌리고, 운명이 다음 포켓몬을 내보냈다.

"가자, 메가대짱이!"

운명이 던진 몬스터볼에서 빛과 함께 포켓몬이 모습을 드러냈고, 포켓몬의 정체가 드러나자 놀란 표정은 실소로 변했다. 운명은 조금 키득거렸다.

―빅굴. ('누가 메가대짱이냐.')

"… 저기, 혹시 두빅굴 닉네임이 메가대짱이야?"

"아니야!"

홍옥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정했다.

"… 그치만 닉네임은 좀 부르기 어렵거든요. 두빅굴, 오물웨이브!"

"뭐길래? … 리피아, 돌아와! 로젤리아, 네 차례야!"

두빅굴의 빠른 오물웨이브는 안타깝게도 리피아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로젤리아에게 약간의 데미지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타입 상성이라면 로젤리아가 단연 유리했다. 하지만 홍옥이라면, 아니, 자신이었다면 이 상황에서는 공격으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쪽에 있어서는 한 번 더 칠 기회였다.

"두빅굴! 대지의힘!"

"로젤리아, 쾌청!"

비는 쏙 들어갔지만 운명은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만약 거기서 매지컬리프를 맞았다면 두빅굴을 잃었을 것이다.

"로젤리아, 매지컬리프!"

"잘했어, 두빅굴! 교대야!"

아직 싸우고 싶어하는 얼굴의 두빅굴을 되돌리고 내보낸 선수는 너트령이었다. 너트령은 과연, 웃는 낯으로 로젤리아의 매지컬리프를 튕겨냈다. 햇살은 강했고 너트령의 표정도 햇살처럼 환했다.

"… 다시 한번!"

"맞아주고 저주해!"

가려울 뿐인 매지컬리프를 한 차례 더 받아내고 철시드는 도무지 남을 저주할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저주를 쌓았다.

홍옥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홍옥은 로젤리아를 되돌리고, 체리꼬를 내보냈다. 그 사이에 너트령은 한 번 더 무언가를 저주했지만, 강한 햇살과 만개한 체리꼬를 보고서 운명은 이번에는 반대로 궁지에 몰렸음을 판단했다. 쌓아둔 저주가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웨더볼!"

"돌아와, 너트령! 두빅굴, 나와!"

불꽃의 덩어리가 된 웨더볼은 눈앞에서 사라진 너트령으로부터 빗나가 두빅굴에게 명중했고, 그제서야 장내를 비추던 햇살이 잠잠해졌다.

하지만 운명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체리꼬, 꽃보라!"

"두빅굴 교체! 다음은~… 너로 정했다!"

기껏 나왔음에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두빅굴을 다시 몬스터볼로 부르며, 운명이 다음 카드를 꺼냈다.

"아직 좀 추운 것 같거든!"

콧구멍에서 연기를 뿜으며 나타난 포켓몬은 코터스였다.

따스하다기보다도 뜨거운 햇살이 또다시 장내를 가득 채웠다.

"뭐야, 너도 맑은 걸 좋아해?"

의외라는 듯이 말하는 홍옥에게, 운명은 곧바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좋아,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데!"

햇빛을 받은 체리꼬는 다시한번 움츠러든 몸을 폈다. 그 꽃보라는 코터스에게는 효과가 별로였지만.

"얕보지 말라구! 체리꼬, 광합성!"

"누가 얕봤다고 그래~? 코터스, 풀파워로 분화야!"

의욕이 가득한 코터스의 분화에 각 트레이너는 튀는 불꽃에 데이지 않기 위해 조금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체리꼬는 그것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렇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아직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코터스보다 빠른 체리꼬와 딱 두 번의 공격으로 체리꼬를 쓰러뜨릴 힘이 있는 코터스.

양측의 트레이너에게 긴 배틀이 보였다.

 

 

광합성과 분화가 4회 반복되고, 어느 한쪽도 쓰러지지 않은 채로 해가 가라앉았다.

"체리꼬, 광합성!"

홍옥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 최선을 골랐다. 운명은 달뜬 숨을 훅, 내뱉고는 땀을 닦고 코터스를 되돌렸다.

"너트령, 널 믿어!"

"체리꼬, 쾌청!"

쾌청에서 웨더볼로 이어지는 흐름은 분명히 너트령에게 있어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인생은 타이밍이다.

"자이로볼로 밀어버려~!"

-자신감이기도 하고.

운명은 경험과 계산에 근거해 믿었고, 너트령은 깔끔한 한 방으로 체리꼬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더이상 너트령을 위협할 다음 턴의 불꽃 웨더볼 같은 건 없었다.

웨더볼이 선택지에서 사라지자, 홍옥에게는 너트령을 쓰러뜨릴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들판체육관이 풀 타입 체육관이기 때문이었다.

홍옥에게 남은 승리의 가능성은 운명의 실수 뿐이었다. 하지만 승리를 목전에 둔 운명에게는 서두름도, 방심도, 과한 걱정도 없었다.

그저 침착한 저주와 자이로볼의 적절한 운용으로 홍옥의 풀 포켓몬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체력이 반 남은 리피아가 쓰러졌고, 기나긴 배틀이 끝났다.

 

 

* * *

 

 

포켓몬센터에서 건강해진 포켓몬들과 함께 나온 운명은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은 일곱번째 배지를 높이 들고 겨울의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고마워, 모두들. 다~ 너희 덕분이야."

들판체육관에서 잘 싸워준 포켓몬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칭찬도 잊지 않고 전달한 뒤, 기다려준 사람을 마주했다.

"그럼 다음 배틀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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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435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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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체육관 도전하러 왔어요~.”

“그냥 체육관?” 호은이 말했다. “장막체육관을 ‘그냥 체육관’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한다면 배지는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참으로 이상한 대화였다.

마지막으로 호은을 마주한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호은이었다—‘에릭단’ 전체를 ‘요주의 인물’로 분류한 그가 운명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대화는 평범한 도전자와 그냥 체육관 관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배틀은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는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은 속여서 보이는 것에 능한 호은. 운명은 장막체육관도 그런 시합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 * *

 

“패리퍼! 열탕!”

“동탁군, 빛의장막입니다.”

항상 패리퍼로 시작하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패리퍼로 시작하는 배틀은 언제나 든든하다. 트레이너와 포켓몬의 호흡이 최근 최고조로 잘 맞고 있어서 그런지, 패리퍼의 열탕은 기세 좋게 동탁군의 급소에 맞는다.

비록 열탕을 거하게 한 번 먹은 상태이긴 하지만 동탁군은 묵묵히 빛의장막을 깐다. 배틀은 채 한 턴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엔트리만으로 상대의 성향을 전부 파악한 호은의 계산이었다.

“유턴으로 돌아와!”

동탁군의 조금 남은 체력 정도는 유턴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운명은 패리퍼를 유턴으로 되돌리고 피츄를 꺼낸다.

“피츄, 드디어 체육관 데뷔야!”

“지금입니다, 트릭룸!”

 그러나 잘 키워진 호은의 동탁군은 쓰러지지 않은 채, 피츄가 몬스터볼에서 나오는 새 트릭룸까지 펼쳐버린다.

호은이 웃는다.

빛의장막에 이어서 트릭룸까지, 동탁군은 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도 웃는다.

첫째, 확실히 자신의 엔트리는 순풍과 쓱쓱으로 빠르게 특수공격을 치고 빠지는 형태이긴 하지만 오늘 고른 세 마리는 그렇지 않다.

둘째,

“… 이런.”

동탁군이 크게 휘청거린다. 혼란이 한순간 호은의 얼굴을 스쳤다 사라진다. 동탁군의 특성은 내열―하지만 불꽃 공격에 큰 데미지를 입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뜨거운 것은 뜨겁고 화상도 걸린다. 단지 티가 나지 않을 뿐. 

“… 돌아오세요, 동탁군.”

마지막 카드였던 대폭발은 꺼내지 못한 채로 끝났다. 그러나 호은은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고 다음 타자로 칼라마네로를 내보낸다.

피츄 다섯마리를 쌓아올린 듯한 크기의 거대한 칼라마네로조차 피츄로부터 첫 체육관 시합의 두근거림은 빼앗아갈 수 없었다. 피츄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칼라마네로의 사나운 눈매를 똑바로 마주한다. 그런 피츄를 보며 운명은 ‘저게 진짜 용감함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피츄의 작은 심장이 두근, 두근, 두근거린다.

“피츄, 번개―!”

이제 전기쇼크를 쓰던 피츄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패리퍼가 몰고 온 비구름을 뚫고 한 줄기의 눈부신 빛이 칼라마네로 위로 내려친다.

배틀필드 바깥까지 찌릿거리는 듯한 번개에 운명의 마음도 찌릿거린다.

“…… 칼라마네로, 뽐내기!”

그러나 칼라마네로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피츄의 혼신의 번개를 가볍게 버텨낸 칼라마네로는 심술궂은 웃음으로 피츄에게 다가온다―

그게 너의 최선이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

―뽐내기는 피츄에게 제대로 먹혀든다.

“신경쓰지 마, 피츄! 볼트체인지! 오기로라도 공격하면 돼. 앞을 보고 달려들어!”

운명은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부 피츄의 귀에는 닿지 않는 공허한 소리다. 칼라마네로의 목소리가 피츄의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공격성은 끝내 자기 자신을 향한다.

“피츄!”

“리플렉터!”

칼라마네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빛의장막에 이어 리플렉터까지 설치한다. 상대가 최악으로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운명이 작게 신음했다.

 

* * *

 

‘엄청난힘을 쌓는다’ 는 원래는 자조가 아니라면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상대가 칼라마네로가 아니라면.

엄청난힘을 두 번 쌓은 호은의 칼라마네로는 그야말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피츄와 패리퍼 양쪽의 공격을 맞고서 칼라마네로도 체력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운명에게도 체력이 온전한 포켓몬은 남아있지 않다.

“철시드, 버텨~! 그리고 씨뿌리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시드는 지켜낼 것이다.

굳이 배틀 도중이 아니더라도 항상 그렇게 되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격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성격 이전에 종족에 새겨진 특징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철시드는 거친 배틀필드에 트레이너와 단 둘이 남은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그런 생각을 하는 포켓몬이다.

철시드에게 부딪쳐오는 엄청난 엄청난힘은 효과가 굉장하게 굉장하지만 철시드는 기어코 버텨내고, 공격을 버텨낸 철시드의 철가시는 칼라마네로의 미끈한 살갗에 깊숙히 파고든다. 그 갈라진 틈새로 철시드는 가시열매의 씨앗을 심는다. 뽐내기보다 얄궂은 여유로운 얼굴로.

“다음 엄청난힘으로 마무리합시다!”

“그렇게는 안되지~! 방어!”

엄청난 엄청난힘도 방어 앞에서는 무력하고, 철시드는 씨앗을 뿌린 만큼 거둔다.

호은은 쓰러진 칼라마네로를 후딘으로 교체한다.

“철시드, 자이로볼!”

“후딘, 앵콜입니다!”

방어를 앵콜당한 철시드의 자이로볼은 불발로 끝나고, 운명은 철시드를 패리퍼로 교체한다.

“사이코키네시스!”

호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후딘의 가장 강력한 공격기로 패리퍼를 격추시킨다.

운명은 다시한번 철시드를 내보낸다.

마지막 포켓몬이다.

하지만 철시드로부터 터져나오는 빛을 보니까 질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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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2037자)
(철시드→너트령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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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연고시티 콘테스트회장

 

심야의 콘테스트홀.

오늘의 마지막 콘테스트가 열린다. 이 콘테스트가 끝나면 퇴근만을 기다려온 직원들이 관객도 참가자도 모두 콘테스트홀 밖으로 쫓아내고 회장을 닫겠지.

그 무대에 서는 것은 로파파, 그리고 나.

이날만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왔는지… 같은 소릴 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물론 로파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맛 포핀을 먹어가면서까지 몹시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리본을 거머쥘 것이다.

 

 

1. 비주얼 심사

 

연고시티에서 빌린 콘테스트 복장으로 갈아입고 몬스터볼을 쥔 채 무대에 올랐다. 다른 세 명의 참가자들과 나란히 서서 무대와 관객석을 두리번거리는 새에 사회자는 우리들의 이름을 한 명씩 전부 호명했다―참가번호 2번, 운명 님. 그것이 오늘의 나였다.

“우선은 심사를 위해 몸치장을 합시다! 자신의 포켓몬을 드레스업!”

슈퍼 콘테스트의 첫번째 순서는 드레스업. 거의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왜 퍼포먼스는 포켓몬이 하는데 참가자 소개는 코디네이터만 하는지,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코디네이터의 모습만을 보이면서 궁금증을 유발했다가, 드레스업 후에야 처음으로 포켓몬을 드러내 비주얼 부문의 임팩트를 최대로 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뭐든지 다 이유가 있구나, 생각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 테마는 창조!”

귀를 의심했다. 창조? 드레스업 테마로? 그게 대체 무슨 뜻인데?

엊그저께 카일럼도 신오지방의 신이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이런 곳에서까지 창조 같은 단어를 들을 줄은. 신오지방에 나도 모르는 새에 신화 열풍이 불었던 것인가?

아무튼 엉겁결에 다른 참가자들을 따라 무대 뒤로 이동했다. 빈약한 악세사리케이스를 열어보았지만 ‘창조’ 같은 테마에 어울릴만한 악세사리는 (당연히도) 없었다. 급하게 구한 리본 몇 개가 얌전하게 놓여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로파파의 목에 붉은 리본이나 하나 달아주었다.

“너 제법 큐트하다, 오늘~.”

(그건 사실이었다. 창조적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귀엽긴 했다.)

“로파파파!”

… 무엇보다 로파파가 기뻐 보여서 다행이었다.

로파파도 기분이 좋아보이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시 무대로 나갔을 땐 진즉에 나온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정작 나와서 보니 정말로 어떻게든 되었다.

모두의 드레스업이 다 별로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창조’같은 주제로 어떻게 케이시급 싱크로율을 내겠어. 가짜 콧수염에 솜 따위를 붙여 꾸민 미꾸리나 알록달록한 깃털을 꽂은 부우부를 보며, 나는 별로 큰일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피곤한 심야반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한 드레스업 퍼포먼스였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공평하게.

 

 

2. 댄스 심사

 

비주얼 심사가 끝나자 대망의 댄스 심사였다.

로파파도 나도 가장 기다린 심사. 이 댄스 심사를 위해서 우리가 오늘 이 콘테스트회자에 발을 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댄스 심사는 참가 포켓몬 모두가 한 번씩 주인공을 하고, 돌아가면서 백댄서를 해주는 아주 공평한 구조로 되어있다. 물론 주인공이 아닐 때도 심사는 이루어지고 있다.

백댄서로서의 로파파는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로파파는 천성적으로 완벽한 리듬감으로… 라고 생각하며 끄떡끄떡하고 있을즈음 로파파가 박자를 놓쳤다.

“실수 한 번은 괜찮아~!”

‘양 옆에서도 계속 실수만 하고 있어!’ 라고 외치려다가 꾹 참았다. 데뷔 무대에서부터 로파파 안티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 하지만 사실이었다. 포켓몬 콘테스트는 어렵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인공의 차례가 돌아왔다.

 

 

 

 

3. 연기 심사

 

지금껏 포켓몬 배틀만 해온 우리에게 연기 심사는 포켓몬 콘테스트에서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들은 바로는, 제대로 기술을 보여줘도 심판이 생각하기에 예술성이 없으면 오히려 나쁜 인상을 준다나. 솔직히 상대에게 제대로 명중만 시키면 아무래도 좋았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갑자기 마스터하기 어려운 분야다.

댄스 심사의 훌륭한 성적을 바탕으로, 우리는 연기 심사의 첫번째 순서를 받았다. 배틀은 ‘선빵필승’이고 이건 배틀이 아니지만 로파파가 처음 필드에 나왔을 때만 제대로 쓸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로파파! 속이다~!”

로파파가 한달음에 심사위원 앞으로 다가가 ‘짝’ 하고 크게 손뼉을 쳤다.

배틀로 단련된 로파파의 속이다에, 심사위원은 (글자 그대로) 아주 뒤집어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심사위원석에 앉아서 말하길,

“…… 쏘 큐트!”

… 그렇지? 완전 귀엽지? 맞는 쪽에서도 귀엽다고 말해준 건 처음이지만 쓰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매번 귀엽다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알아준 기분이 들어서 뭉클하기까지 했다.

첫 어필은 잘 되어서 안심이었다. 이어지는 다른 참가자들의 어필을 보면서 이게 어디가 귀여운 건지 나는 열심히 고민했다. 진흙뿌리기가 도대체 어떻게 귀여운가?

 

두 라운드쯤 돌고 나서야, 드디어 콘테스트의 구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포켓몬의 기술 자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심사위원의 기억에 남는 것이다.

게다가 콘테스트 연습을 많이 해온 듯한 미꾸리가 워낙에 귀엽게 꾸물거리면서 기술을 쓰는 탓에, 정공법으로 간다면 아무래도 리본을 뺏길 위기였다.

어필할 수 있는 심사위원은 총 세 명이다. 그리고 두 마리의 어필을 본 심사위원은 필연적으로 한 마리의 어필만 본 심사위원보다 전체적으로 기술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미꾸리의 차례가 방금 막 끝났다.

나는 미꾸리가 어필한 심사위원과 ‘같은’ 심사위원을 지목하고, 로파파에게 최고로 큐트한 기술 그 두번째를 지시한다.

“로파파, 방어! 우리들의 배틀로 단련된 큐티하고 퍼펙트한 방어를 보여줘!” 

 

그리고 다섯 번쯤 초 귀여운 기술을 본 심사위원은 지금까지의 흥분이 쌓여서 뭔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원더풀~! 지금까지 본 방어 중 가장 완벽했어요!”

 

―그것은 실제 기술의 퀄리티보다는, 그저 타이밍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4. 결과 발표

 

“우선은 비주얼 심사의 결과를 발표합니다! …”

비주얼 심사의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처참했다. 창조가 뭐야, 창조가.

 

“다음은 댄스 심사의 결과를…”

두말할 것 없이 우리가 가장 우수했다. 모든 것이 로파파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연기 심사…”

놀랍게도 우리의 점수는 우리들의 어마무시한 라이벌 미꾸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눈물의 타이밍 작전이 먹혀든 것이었다. 

 

“우승은 참가번호 2번! 미스 데스티니와 로파파! 축하합니다!”

 

우리가 해냈어, 로파파!

 

.

.

.

(* 진행자의 대사 대부분은 정발판 <포켓몬스터 디아루가>의 스크립트에서 가져왔습니다.)

(* 공미포 2459자)

(* 로파파 26~30 레벨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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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해 포켓몬과 함께 수련하는가?

선단시티의 관장에게 너는 포켓몬과 함께 배틀을 즐기고 싶다, 고 대답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증명하고 인정받겠다는 생각만으로 달려왔던 시절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빼앗기기 전에 주어진 것을 즐긴다는 생각은 배틀로 치환해도 지는 것이 당연한 게임이다. 이길 생각으로 전략을 짜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모두의 멘토인 너라면 진즉에 알고 있었던 사실이겠지.

 

“체육관 도전하러 왔어요~!”

해가 중천에 뜬 한낮, 힘차게 체육관 문을 열어젖히고 도전자가 입장했다.

일행에 섞여있던 트레이너를 알아본 체육관 관장이 미소를 머금고 그를 맞이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이 어떤 질문을 말하는지, 다시 한번 말해주지 않아도 운명은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가 질서라고 믿던 존재에 혼돈이 깃들어 있다면, 그로써 너희는 이후에 무엇을 믿을 거지?’

 

“저는… 더이상 누군가가 만든 틀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아요.

내 정의는 내가 정하고 싶어요.

 

(이것이 이 신오지방에 군림하는 여왕과 다름없는 오만이라고 하더라도)

 

소중한 것을 계속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삶을 원해요.”

 

잘 들었다, 너의 각오. 물가시티 체육관 관장이 웃었다.

 

―시합 형식은 어떻게 하겠는가?

―세 마리로 부탁드립니다.

―어째서 세 마리지?

―그것이 트레이너의 실력을 가장 냉정하게 판가름하는 배틀의 형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다. 상대방의 여섯 마리를 알고서 고르는 세 마리. 거기서부터 이미 승부는 시작되어 있는 거다. 그리고 세 마리뿐이기에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물러날 곳이 없는 무자비한 배틀, 그것이 과거 플랫배틀이라고도 불렸던 유서 깊은 싱글배틀의 왕도. … 오너라!

 

필드에 내리는 비는 배틀의 시작을 알린다. 도전자의 선봉장은 비를 부르는 새 포켓몬. 도시와 체육관 배지의 수호자는 갈고리손톱의 짐승, 포푸니라로 배틀을 연다. 비열하게 입꼬리를 히죽이는 저 포켓몬이 어떤 기술로 시작할지는 예상했기에 도전자는 패리퍼를 요새로 들여보낸다. 그러나 체육관 관장이 바라보는 곳은 그보다도 앞에 있어서, 포푸니라는 속이지 않고 철시드에게 똑바로 고드름을 내리꽂는다. 재앙처럼 내려오는 고드름을 막 교체되어 나온 철시드는 묵묵히 받아낸다. 이번에는 관장이 수를 바꾸어 쓴다. 머리 세 개의 용이 포효하며 나타난다. 운명은 그것의 기술들을 미리 읽어두었고, 잊지 않았다.

아아, 마음을 고쳐먹어도 시합은 전혀 거칠기만 하구나.

온도를 알 수 없는 바닷물에 우선 발을 담가보듯이 철시드에게 방어를 지시한다. 생각한 그대로의 화염방사가 날아든다. 빗속인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두 번째 화염방사를 맞기 전에 두까비로 교체한다.

그러나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신오지방에서 여섯 개의 검은 날개는 세계의 이면에서 군림하는 악마신을 상징했다. 지금은 누구나에게 잊힌 전설의 일부이지만, 레지나가 이끄는 세 쌍의 날개가 악의파동으로 모든 것을 휩쓸었을 때 운명은 선조들이 전설 앞에서 무릎 꿇었듯 굴복해야 했다.

 

* * *

 

“제가 돌아왔습니다~!”

가로등이 켜진 한밤, 이번에도 힘차게 체육관 문을 열어젖히고 도전자가 입장했다.

“재도전이 빠르군?” 재미있다는 듯 체육관 관장이 웃었다. “하지만 근성만으로는 내게서 글로워배지를 얻을 수 없을 거다.”

“낮의 경기는 확실히 복기했어요!”

 

“가랏, 철시드~!”

선발이 바뀐 것을 본 레지나는 “호오,” 하고 두 번째의 도전에 조금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레지나는 포푸니라에게 속이다를 지시하고 나서야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밖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철가시에 찔린 포푸니라가 움찔한다. 아마 속이다로 철시드가 입은 데미지보다 더 타격이 컸을 것이다.

상대는 더이상 유효타가 없다. 그리고 낮에는 철시드를 삼삼드래의 화염방사에 내줬으니까… 아마 낮의 상황을 반복하기 위해 상대는 삼삼드래로 교체해올 것이다. 그렇다면 특수방어는 올려주지 않는 저주를 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철시드, 자이로볼!”

예상대로 자이로볼이 교체로 나온 삼삼드래에게 명중한다. 그렇지만 화염방사에 철시드를 또 한 번 내줄 의향은 없으므로 이번에는 패리퍼로 교체한다. 패리퍼에게 화염방사는 효과가 별로다.

“…… 낮에 비해 제법 하는구나.”

“근성 뿐만은 아니라구요~.”

삼삼드래와 패리퍼, 두 마리 날짐승의 정면승부다.

운명은 자신에게 달린 한 쌍의 날개를 믿는다.

다음 턴에는 저 삼삼드래의 가장 강한 기술이 날아오겠지.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채로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다음 공격은 버틴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이다음이 있다면, 트레이너로서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파트너와 연결되어있되, 파트너의 눈앞의 상대의 그 너머까지를 보아야만 하는 존재인 트레이너로서,

“삼삼드래, 용성군이다!”

“패리퍼, 순풍!”

 

  

* * *

 

“운명 양,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왔구나

하지만 지금부터는 네 분노가 용기가 될 것이다

그 한 몸을 날카로운 검으로 하여금”

 

“저의, 그리고 모두의 미래를 지켜 보이겠어요!”

 

너는 빛나는 배지를 거머쥐었다.

너는 약한 너에게 안녕을 고했다.

 

 

.

.

.

*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 만화 <베르세르크>를 인용했습니다.

 

(공미포 1943자)
(패리퍼 41~45 레벨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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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냥하세요~! 선단체육관 도전합니다~!”

“어서와라, 도전자. 네 번째 도전인가?”

“네~! 잘 부탁드립니당~.”

 

시작은 항상 패리퍼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천장에조차 비구름을 불러오는 그 특성은 전설의 한 조각이다. 상대는 견고라스로 시작한다. 온몸을 감싼 견고한 비늘에서 그 이름을 받은 포켓몬. 껍질 같은 비늘 속에서 용이 흉악한 어금니를 내보인다. 포켓몬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타당하다. 그러나 포켓몬 트레이너는 그 위에 군림한다. 설원 속에서 포악한 용을 조련하는 체육관 관장이 양날박치기를 명한다. 불 속에 뛰어드는 벌레와 다른 점은 용은 벌레와 달라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잠기지 않는다. 그것이 드래곤.

연약한 깃털 속 부드러운 근육과 저것이 맞닥뜨리기 전에 운명은 선수를 교체한다. 철시드라면 괜찮은 상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양날박치기가 강철의 갑옷에 힘차게 부딪쳐 불꽃이 튀긴다. 녹색의 가시가 꺾인 나무열매의 괴수가 신음했지만 아직 단단한 껍질에는 잔상처뿐이다.

―아직 갈 수 있어?

―아직 갈 수 있어.

눈빛이 오고갔다.

“자이로볼!”

철시드는 온몸을 회전하며 느릿하게 나아가는 강철의 구가 된다. 느린 기술일지언정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절대 노린 것을 놓치지 않는 기술, 자이로볼이 견고라스를 향한다. 목표를 끝까지 쫓아 묵직하게 명중시킨다. 하지만 견고라스도 그저 피할 수 없는 기술을 피하기 위해 덧없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은 용족 고유의 춤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종족의 과시의 전통은 인간과 포켓몬 트레이너의 등장 이후로도 이어져왔다. 더욱 흉포해진 견고라스의 양날박치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오늘 아침에 딴 배리열매처럼 툭, 하고 철시드가 땅에 떨어진다. 스러져간 몬스터에는 경의를 표하며 몬스터볼로 되돌린다.

콧김을 뿜는 용의 상대로는 냉정한 대포무노를 믿는다. 그것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흥분한 용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는 트레이너를 한 번 돌아본다. 트레이너여, 너의 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가? 배틀필드에 선 나의 눈앞에 있는 괴수, 그 너머의 승부를 내다볼 수 있는가?

흥이 오른 용과 그 조련사가 두 번째의 용춤을 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대포무노포를 쏜다. 단단한 비늘의 틈새로 바다생물의 투지가 새어들어와 바위룡은 눈을 크게 뜬다. 몸속에 스며드는 이물질에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눈빛은 다음 순간에는 배틀을 위한 분노를 담는다. 그 분노를 이 순간 상대를 향한 기술로 승화시키는 트레이너는 이미 포켓몬과 한몸이다―”드래곤크루!”

용의 긍지와 공격받은 굴욕을 담아 엄습해오는 손톱은 빗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미끈하고 부드러운 대포무노의 살결을 정확하게 베어가른다. 물이 오른 용 앞에서 작은 바다생물은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트레이너에 소속된 포켓몬은 제 야성을 억누르며 포식자의 눈으로만 대포무노를 내려다볼 뿐이다.

대포무노는 수치를 느낀다.

차갑게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느낀다.

쓰러지기 직전인 몸을 겨우 가누는 채 제 트레이너를 뒤돌아본다.

“한 번 더, 대포무노포.”

저를 한 끼 식사처럼 내려다보는 용의 면상을 향해 저들 대포무노 사이에서만 전해져내려오는 기술을 한 방 갈겨준다. 전통과 긍지라면 이쪽에도 있다. 한마리째의 용이 풀썩 쓰러져 흙먼지가 날린다.

도운은 한카리아스로 교체한다. 대포무노를 향한 지진이 명중하기 전에 포켓몬을 패리퍼로 교체한다. 땅을 울리고 가르는 강력한 지진이라도 하늘은 나는 포켓몬을 맞힐 수는 없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트레이너를 사랑하는 새 포켓몬이 불러오는 해일은 강하다. 그러나 교체되어 나온 용은 그 마음마저 조소하듯이 이슬비를 맞듯 파도타기를 털어낸다. 형광빛의 점액을 불길하게 뚝뚝 떨어뜨리며 미끄래곤이 여유롭게 웃는다. 다음 턴의 번개로 운명과 패리퍼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한다.

패리퍼는 땅에 떨어지는데 굵은 빗방울이 멎지 않는다. 뚝, 뚝, 하고, 녹색 점액질과 섞여 필드 위로 떨어진다. 빗방울과 타는 냄새와 흙먼지 너머로 용은 여전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들었구나. 배틀에 임하는 포켓몬으로서의 자존심을 짓밟는 형광색 눈빛에 끝까지 저항하지만 날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내, 이만 푹 쉬라고 속삭이는 트레이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무것도 없는 편안한 어둠 속으로 되돌아간다.

“로파파, 너를 믿어.”

속이다를 맞은 포켓몬은 풀이 죽어 움직일 수 없다. 웃음이 지워진 미끄래곤의 얼굴을 눈에 새긴다. 저 드래곤 포켓몬의 콧대를 눌러주자. 그런 운명의 마음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로파파가 끄떡인다. 이어지는 배틀은 냉동빔과 역린의 대치다. 그러나 드래곤 포켓몬의 역린 쪽이 더 강하다. 정면승부 끝에 로파파가 쓰러지고 마지막으로 남은 포켓몬인 대포무노를 다시 내보낸다.

숨결조차 실낱같은 대포무노다

하지만 시합 중에 등을 돌릴 수는 없어서

자만하여 공격한 용은 혼란에 빠지고 그 틈에 대포무노포로 희미하게 체력이 남아있었던 용을 처치한다. 두 마리째다. 강하구나, 대포무노. 하고 불러보지만 어쩐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기분이 든다.

그야 상대는 아직 한 마리가 남아있고.

밝은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킹드라를 보고, 대포무노는 몬스터볼 속에서 지켜보았던 미끄래곤의 눈빛을 기억한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들었구나, 가엾게도.

 

―용맹하게 싸운 도전자에게는 드래곤타입 최강의 기술로.

 

하지만 대포무노가 느끼기에, 쓰는 쪽은 어떤지 몰라도 용성군을 맞는 것은 썩 영예로운 경험은 아니다.

 

 

.

.

(공미포 2055자)

(* 패배 로그입니다.)

(* 철시드 16~20 레벨대 [2/2], 철시드 레벨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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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럼은 싫어요~.

카일럼이 배지를 따지 않으면 트레이너 안 시켜줄거라고 해서,
그런데 배지는 남을 위해서 따는 게 아니잖아요
나는 남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배틀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카일럼의 시선이 싫어서 체육관을 보이콧하기로 했었는데

그런데 오늘 여기에 와버렸어요

사실 체육관의 근본이 카일럼에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어제 그런 기분이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체육관에 도전하기로 했어요

왜냐면 분명히 언젠가는...

말이 많았네요
시작할까요~!

 

*운하체육관 도전 성공 로그

*패리퍼 36~40 레벨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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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토스~, 속이다!”

   배틀은 기선제압―두 번째 트레이너 캠프에서 만난 신참 트레이너들에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홍옥이 선출한 로젤리아는 로토스의 속이다에 그대로 풀이 죽어 배틀의 첫 움직임에 실패했다. 운명은 그것으로 한 걸음 앞서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냉동빔~!”

   “괜찮아, 로젤리아! 쾌청이야!”

   과연, 역시 쾌청이다. 안내 책자에서 홍옥의 엔트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직설적인 ‘쾌청 파티’라고 생각했다. 강한 햇살 아래에서는 웨더볼이 강력한 불꽃 타입 기술로 변하고, 특성이 ‘엽록소’인 포켓몬의 스피드가 두 배로 빨라진다… 운명은 질릴 만큼 잘 알고 있는 전술이었다.

   날씨를 마음에 들게 고정했다고 생각한 홍옥이 데미지를 입은 로젤리아를 되돌리고 포켓몬을 체리꼬로 교체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이쪽에서도 패리퍼로 교체한다. 포지티브 폼으로 개화했던 체리꼬가 순식간에 빗방울을 맞고 다시 네거티브 폼으로 돌아갔다. ‘쾌청을 상대로는 비가 유리하다.’ 운명은 조금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홍옥도 웃고 있었다.

   “너의 배틀 컨셉은 비바라기구나! 재밌네! 좋은 라이벌 매치게 되겠는걸!”

   “이 기세로 폭풍이야, 패리퍼~!”

   “체리꼬! 버텨! 버텨내고 다시한번 쾌청!”

   체리꼬가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패리퍼의 폭풍을 버텨내고, 필드에 강한 햇살을 다시한번 가지고 왔다. 그래도 아직은 무너지지 않는 웃는 얼굴로, 운명이 패리퍼를 되돌리고 로토스를 내보냈다. 그래, 날씨 싸움이 되리라고도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런 경우도 대비하고 있었다. 그새 만개한 체리꼬는 폭풍으로 받았던 데미지를 광합성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체리꼬, 꽃보라!”

   “로토스, 비바라기~!”

   포지티브 폼이 된 체리꼬의 꽃보라는 생각보다 강하게 로토스를 휩쓸었고, 그러나 로토스도 지지 않고 다시한번 먹구름을 끌고와 체리꼬를 도로 폼체인지시켰다.

   “로토스~, 냉동빔으로 끝내버리자~!”

   “체리꼬는 이정도로는 아직 쓰러지지 않아! 그렇지, 체리꼬? 쾌청이야!”

   체리꼬는 휘청거리면서도, 절대 쓰러지지는 않고 끈질기게 필드에 쾌청을 깔았다. 치열한 날씨 공방―그 아이디어 자체가 운명을 말려들게 하고 있었다. 체리꼬가 계속해서 쾌청을 써온다면, 이쪽이 아무리 비바라기를 써도 소용이 없다. 그런 생각으로 로토스에게 두 발째의 냉동빔을 지시했지만, 체리꼬는 한 발 빠르게 광합성으로 체력을 회복했다. 체력을 회복한 포지티브 폼의 체리꼬에게 얼음타입도 아닌 로토스의 냉동빔은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체리꼬, 버티느라 힘들었지? 꽃보라로 복수해주자!”

로토스 역시 풀 타입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꽃보라를 버티지 못하고 로토스는 쓰러졌다.

괜찮아, 로토스. 제일 앞에서 수고해줘서 고마워~. 몬스터볼을 향해 속삭이고, 패리퍼를 내보내서 로토스의 원수를 갚기라도 하듯이, 강한 햇살을 지우고 비를 뿌렸다.

   “로젤리아, 풀피리!”

   “피하고 폭풍이야~!”

   그러나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기술을 피하지 못했다. 패리퍼의 날갯짓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추며 필드 위로 풀썩 쓰러졌다.

   “지금이야, 로젤리아! 쾌청!”

   이제 몇 번째인지도 모를 쾌청으로 필드가 다시 환해졌다. 잠든 패리퍼를 몬스터볼로 되돌리고 두까비를 꺼냈다. 홍옥 쪽도 이쪽의 교체를 읽은 것인지, 아니면 로젤리아로는 패리퍼에게 별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로젤리아를 되돌리고 버섯모를 내보냈다.

   “우리 에이스, 버섯모야!”

   “이쪽의 오늘의 에이스는 두까비거든! 쓰러뜨려 보이겠어~!”

   두까비와 시선을 교환했다. 오늘을 위해 특훈하고, 그 결과 진화의 쾌거까지 이룬 두까비였다. 오늘 기합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두까비의 두 눈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밝은 태양이 아닌 누구보다도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보이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은 무엇을 위한 증명인가?’ 하고 질문하며 멈춰서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멈춰설 때가 아니다. 배틀필드 위에서는 멈출 수 없다.

   “버섯모, 맹독!”

   “이쪽은 비바라기야~!”

   버섯모의 독기를 담은 손길이 이쪽을 향해왔다. 운명은 풀 타입 공격 기술이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풀 타입의 공격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추론까지 해냈다. 두까비는 맹독을 맞아주고, 대신 필드에 다시 비를 가져왔다. 휘몰아치는 빗방울이 승리의 상징이라고 믿고 싶었다. 비를 받아 빨라진 두까비는 어떤 풀 포켓몬도 무섭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지금이야, 두까비! 오물웨이브~!”

   “괜찮아, 버섯모! 방어!”

   기세 좋게 나간 오물웨이브가 어떤 기술이든 막아내는 견고한 방어에 튕겨져 나갔다. 점점 몸에 퍼져가는 맹독에 두까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 눈빛은 떨리지 않았다.

   “마하펀치!”

   “다시한번 오물웨이브~!”

   맹독, 방어, 마하펀치… 버섯모의 마지막 기술은 뭘까? 풀 타입 공격기술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두까비와 버섯모가 서로 공격을 교환했다. 더 큰 데미지를 입은 것은 단연코 약점을 찔린 버섯모 쪽이었지만, 아직 쓰러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느껴지는 독도 몸에 퍼지면 퍼질수록 진정한 맹독이 되어간다. 두까비가 크게 휘청거렸다.

   “…두까비, 들어와.”

   ―…….

   트레이너를 뒤돌아보는 두까비는 상처받은 표정이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다음 공격은 방어당하고, 두까비는 맹독의 데미지로 쓰러진다.

   몬스터볼에 되돌려지기 직전의 눈빛은 쓰라렸지만 납득하고 있었다.

   “패리퍼, 네 차례야~!”

   그렇게 말하며 내보낸 패리퍼는 여전히 잠들어있는 상태였다.

   “버섯모, 씨뿌리기!”

   패리퍼가 모습을 나타내자마자, 그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홍옥이 지시했다.

   “패리퍼, 일어나~! 폭풍을 써줘!”

   “이 틈에 마하펀치!”

   아직은 눈을 뜨지 못하는 패리퍼에게 마하펀치가 꽂힌다. 패리퍼에 몸에 심어진 씨앗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패리퍼의 체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비가 그쳤다.

   “계속해서 마하펀치를 꽂아버려!”

   “패리퍼~~, 폭풍!!”

   마침내 트레이너의 목소리는 포켓몬에게 닿는다. 패리퍼는 눈을 번뜩 떴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는 필드에서의 폭풍의 명중률은 처참했다. 씨앗이 앗아가는 체력의 정도는 심하지 않았고, 마하펀치 역시 효과가 별로인 기술이었지만, 데미지는 꾸준히 중첩되고 있었다.

   폭풍 한 번이면 저 버섯모를 쓰러뜨릴 수 있다. 폭풍이 단 한 번이라도 맞는다면.

   “폭풍!”

   “방어해!”

   그것은 상대 측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어 역시 연속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라는 사실은 운명과 패리퍼에게 희망을 남겨주었다.

   “기죽지 말고 계속해서 폭풍~!”

   “마하펀치 후 피해! 힛 앤 런이야!”

   “괜찮아, 이번엔 맞출 수 있어! 다시한번!”

   “그렇게는 못 두지! 방어!”

   언뜻 미련한 시간 끌기로밖에 보이는 홍옥의 전술은 확실히 먹혀들고 있었고, 패리퍼 쪽은 몇 턴 전 몸에 심어진 씨앗에 이제는 대부분의 체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패리퍼! 이번에 저쪽은 방어 못 해! 폭풍이야!”

   “마하펀치!!”

   마하펀치가 패리퍼에게 강력한 한 방을 먹였다. 패리퍼는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 했지만, 의식이 떠날 듯한 그 순간에 트레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패리퍼는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

   포효하며, 패리퍼가 폭풍을 명중시켰다.

   “버섯모!!!”

   쓰러진 에이스 포켓몬을 몬스터볼로 되돌리며, 홍옥이 숨을 골랐다. 아까 패리퍼를 상대했던 포켓몬은…

   “로젤리아, 너로 정했다!”

   그리고 거기서 운명은 웃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끝을 직감한 순간의 운명이 짓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듯한 부드러운 실소였다. 배틀의 흐름은 이미 놓쳤다. 로젤리아는 패리퍼보다 빠르고, 무조건 명중하는 기술인 매지컬리프를 쓴다. 패리퍼에게는 그것을 버틸만한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패리퍼가 쓰러지면 더이상 비가 내릴 구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로토스는 쓰러졌다. 두까비에게 비바라기를 지시하면 비야 내리겠지만, 그 다음에 매지컬리프를 맞고 일격에 쓰러질 뿐이다. 그렇다고 오물웨이브를 지시하더라도, 한 번으로는 로젤리아를 쓰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만약 로젤리아를 쓰러뜨린다면? 그 뒤에는? …

   “…… 이젠 너밖에 없어, 두까비~.”

   몬스터볼에서 나온 두까비가 필드의 상황을 파악한 뒤 운명을 한 번 노려보았다. 두까비는 자존심이 강한 포켓몬이었다.

   “일단 방어해~!”

   그것은 의례적인 지시였다. 두까비의 눈앞에서 ‘아! 제가 진 것 같아요. 이제 집에 갈게요.’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내리는 지시.

   “로젤리아, 쾌청!”

   비가 그친 뒤에는 맑음이라는 말이 있었던가. 녹아내릴 것만 같이 쨍쨍한 하늘 아래서 운명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은 몇 년도의 몇월 몇일이었더라? 다 아는 전략에 휘말려 패배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뜨내기 브리더’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너는 뜨내기 쾌청 트레이너다!’ 하고 자신있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 때는 말이야~, 쾌청을 깔고 세 턴이면 배틀이 끝났다구~! …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로토스와 패리퍼와 동챙이와 함께할 일도 없었으려나.

   “매지컬리프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홍옥의 마지막 일격이 잡념을 뚫고 날아와 꽂혔다.

 

 

(공백 제외 3496자)

(패배 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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